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리 채플린 (문단 편집) === 정치/사회적 논쟁거리 ===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정치적 성향이었다.《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개박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 [[아돌프 히틀러|총통 양반]]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 이때의 미국 극우는 인종차별주의 정당화를 주장하였다.] 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 《모던 타임즈》의 공장 장면이 나치스 치하의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 "우리에게 자유를"의 장면을 도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프라우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거기다 찰리 채플린은 인종차별을 반대하였기에 [[KKK]]단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도 위협을 받고 하였으며 당시 인종차별주의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찰리 채플린이 인종차별반대 나치 비판을 핑계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단정짓고 찰리 채플린을 감시 및 도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반미활동위원회'라는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타머스 인츠[* 초기 영화 시절 [[서부극]]을 시도했던 감독이자 제작자다.]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츠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츠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 혹은 피범벅이 된 인츠의 시체가 실려 나왔다.]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츠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 채플린, 그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츠가 요트 위에서 허스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츠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채플린[* 자신은 인츠의 장례식장에 간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후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등등.]이나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 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인츠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라는 인츠의 사인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츠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어쨌든 [[대한민국|우리나라]]에서 그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가 금지가 모두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영화 감독)|정진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